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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예쁜 산야·풍성한 이야기' 영호남 문화 잇는 징검다리

입력 2022년 07월 14일(목) 10:46 수정 2022년 07월 18일(월) 15:23
배움으로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닌 훈몽재는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이 1548년(명종3년)에 순창 점안촌 백방산 자락에 세운 강학당이다. 임정옥기자joi5605@mdilbo.com

[광주에서 대구까지 미리 달려본 달빛내륙철도]순창역<상> 사상과 맛의 고장 순창에 가다

달빛 철도가 연결되면 가장 빛날 고장이 순창군이다. 수려한 산야에 풍부한 이야기꽃의 고장 순창은 영·호남 사상과 문화, 관광에 걸쳐 가교 역학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순창은 전라북도에 속해 있지만 달빛 철도가 연결되면 광주시와 담양군을 이웃으로 둔 덕에 빛쪽 광주와 달쪽 대구를 비추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할 전망이다.

순창군은 담양군과 도계를 이룬다. 순창군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다. 멀리 마한시대때는 오산 (烏山),옥천(玉川)으로 불렸고 백제때는 도실(道實)이라 했다. 고 려시대 들어 순창현으로 남원부에 속하게 된다. 고려 명종 5년 (1135년) 감무를 두었고 충숙왕 1년 (1314년)에 순창군으로 승격했다. 현재 순창군은 순창읍을 비롯해 복흥· 쌍치·구림·팔덕·인계· 적성·동계·유등·풍산·금과면등 1읍 10면으로 이뤄져 있다.


◆영호남 선비 사상의 징검다리 순창

순창군은 달빛 철도가 열리는 날 영호남의 길고긴 사상적 교류가 드디어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는 순창에 유교 사상적으로나 민주주의 발전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달빛 철도가 열리는 날 순창이 왜 선비의 고장인지, 민주화의 선진 고장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중심에 호남 성리학의 태두 하서 김인후와 퇴계 이황이 자리하고 현대에 들어서 가인 김병로가 자리한다.

하서 김인후는 전남 장성사람이다. 1540년 과거에 급제해 문신의 길을 걸었다. 당대 석학 퇴계와 하서는 조선 중기 학문의 깊이를 한 차원 드높인 인물들로 서로를 존경했다. 하서가 홍문관으로 인종의 스승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는 당파싸움이 최고조에 달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잇달았다. 인종은 김인후의 바램처럼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8개월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그러자 김인후는 "패악무도한 정치에 더는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고향 장성으로 낙향한다. 낙향한 김인후에게 벼슬자리 같은 것은 한낱 뜬구름이었다. 중앙 정계의 부름을 8번이나 거부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순창 '선비의 길'은 조선 중기 대표적 성리학자인 하서 김인후 선생이 제자를 양성한 훈몽재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생가 등 다양한 역사 문화 자원을 만날 수 있는 역사 문화 탐방 길이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하서 김인후의 빈자리 훈몽재

유교적 가치에서 보면 하서의 가르침은 선비로서 더함도 덜함도 없었다. 교육자로서 한 치 흐트러짐 없는 하서의 흔적이 순창군 쌍치면 훈몽재(訓蒙齊)에 오롯이 남아있다. 낙향한 하서 김인후는 고향인 전남 장성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잠시 순창에 머물며 훈장 역할을 한다. 그 배움터가 오늘날 훈몽재다. 때는 1548년부터 부친이 돌아가시기전 약 2년간이었다. 하서 김인후와 퇴계 이황의 인간적 깊이로 봐서 훈몽재가 영호남 유학 사상의 교류지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훈몽재는 영남 유학과 호남 유학사상의 교류 중심지였다해도 무리는 없다. 훈몽재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본뜬 것으로 원래 훈몽재는 소실되고 현재는 2009년 복원되었으니 그 유지터만 남아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영호남의 정신적 만남과 선비 정신마저 퇴색한 것은 아니다. 입구 왼편에 자리한 삼연정은 하서 김인후의 산(山), 수(水), 인 (人), 즉 삼자연(三自然)을 노래한 자연가 (自然歌)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훈몽재에 왔다면 선비의 길을 따라 가 볼일이다. 훈몽재에서 낙덕정까지 6㎞길이가 선비길이다. 왼쪽에는 추령천이 오른쪽에는 수려한 산이 있어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훈몽재에서 사과정-석보교-김병로 생가-낙덕정에 이르는 역사 탐방 길이 잘 닦여 있다. 이 길은 하서 선생과 제자들이 길에서 만나 교육하는 길이다. 농로길 6㎞정도니 쉬엄 쉬엄 가되 어떻게 사는 길이 옳은지 사색하며 걷는 길이다. 훈몽재서 출발하면 처음 1㎞정도는 데크길이어서 걷는데 부담이 없다.

13일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887~1964)선생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생가복원

선비 길을 걷다 보면 복흥면 하서에서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를 생가터에 이른다. 가인 김병로하면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 자리일 뿐 그가 우리에게 남긴 족적은 너무나 장엄하고 뚜렷하다.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가인 김병로가 남긴 법치국가이념은 가히 기념비 적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거의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초석을 다졌다고 추앙받는 인물이 가인이다.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법을 공부한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론하고 그 가족 까지 챙겼던 선각자였다. 그의 고민은 법으로 차별하는 일본제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되고 김병로는 해방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이 된다.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그는 법치 국가의 기틀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갓 해방된 대한민국에 법치가 뿌리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법치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엄격해야 했다. 가인은 칼날 위에 선 듯 청렴을 실천한다. 그야말로 공복의 모범이었다. 어느날 한 후배가 생활고를 한탄했다. 판사 월급이라 해봐야 굶지 않을 정도의 시절이었다. 그러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나도 죽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고 위로 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철저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6.25전쟁통에도 그는 법전을 놓지 않았다. 가난과 밤낮 없는 격무에 시달리던 가인에게 병마가 들이 닥친다. 골수암으로 다리까지 절단하게 되었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원칙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요, 정치는 국민의 복리증진이 목적이다"는 것이었다.


하서 김인후가 예언한 인물 가인 김병로

가인 김병로는 하서 김인후의 15대 손이다. 하서는 늘 입버릇처럼 선비길 끝자락 낙덕정에 서면 "하서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다"고 예언했다. 거기서 탄생한 인물이 가인 김병로다. 가인의 법치주의는 끝내 국가 최고 권력과 운명적으로 부닥친다. 이승만 장기집권과의 충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장기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개헌이라는 국악무도한 사고를 친다. 중임제를 폐지하기 위해 개헌을 시도 했으나 딱 한 표가 부족하자 기상천외한 수학기법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칙주의자 가인 김병로는 눈엣가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직을 요구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면서 거부했다.

대한민국이 이정도 민주주의나마 유지한 것은 가인이 추구한 청렴과 법치주의 덕을 입었다. 가인 김병로 생가는 복흥면 하리에 2014년 복원됐다. 본체와 행랑체로 나뉘어진 생가터는 작지만 야무지다. 집의 구조나 모양새 보다 시대의 선각자 삶을 되돌아 보는 것이 방문 목적이 돼야 할 것이다.

고당 김충호 훈몽재 산장

고당 김충호 훈몽재 산장(76)은 "하서 김인후의 유교 정신은 물질만능 시대에도 현대인들이 마음에 새겨야할 정신세계입니다"훈몽재에서 하서 사상을 가르치는 고당 김충호 산장님의 일성이다. 그러면서 그는 "훈몽재는 전국 유일의 하서 강학당"이라고 강조한다.

훈몽재는 영남의 퇴계도산 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호남 유교 정신의 뿌리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고당에 따르면 "하서와 퇴계시대때만 해도 퇴계는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이 이끄는 호남 유교 문풍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서와 고봉에서 대가 끊기면서 호남 유학 명맥이 퇴조 하고 말았다" 고 한탄한다. 하서가 말년에 훈몽재를 지어 제자를 기른 뜻은 선비로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려 함이었다.

오늘날 호남 유학의 보루 훈몽재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금은 멀리 중국에서까지 훈몽재를 찾는다. 중국 남창·무한·심천·과기대학등에서 매년 40명의 교수와 학생이 찾아 하서의 사상을 배운다. 코로나로 한때 주춤하던 학생이 늘고 있지만 인근 전남대와 조선대는 한명도 보내지 않아 산장님의 고뇌가 크다. 고당 김충호 산장은 "호남 사람들이 지켜야할 유교 문풍을 영남 사람들이 대신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훈몽재 자연당에서는 지금도 낭낭하게 책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호남 선비의 원류를 지키려는 열정으로 논어와 맹자, 사서 삼경을 배우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다. 오직 하서를 배우려는 열의와 예의가 있을 뿐이다. "옛것이 없이 어찌 새 것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으로 하서는 현대인들에게 벼락같은 죽비를 든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