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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영상] 강진, 다산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서

입력 2022년 09월 21일(수) 10:22 수정 2022년 09월 21일(수) 10:30
다산박물관앞 다산정약용 동상과 말씀의 숲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이 글은 다산 정약용이 1818년(순조 18)에 강진에서 쓴 목민심서 중의 한 부분이다.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시민이 피땀 흘려 낸 세금을 낭비해 용산 집무실로 무리하게 옮긴 후 수백억을 들여 영빈관을 짓겠다고 했다가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마치 선심 쓰듯 철회하는 현시대 정치인 뼈를 때리는 글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이 남도 답사 일 번지가 되는 데에도 큰 몫을 차지한다. 전남 강진군이 다산 선생의 고향은 아니지만, 선생의 제2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영조 38년) 8월 5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지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으나,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때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을 왔다. 선생은 귀양 온 강진에서 실의에 빠져 허송세월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강진 유배 기간 학문 연구에 매진해 실학적 학문을 완성하고 꽃을 피웠다. 강진에서 유배를 산 기간이 관료로서는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 많은 제자를 키워내며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유배 기간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세웠다. 특히 눈에 띄는 업적은 조선 시대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했다. 선생의 개혁안은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다산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선생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책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 선생의 책 대부분이 강진 유배기에 쓰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강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의 대표적 인물인 다산 정약용을 완성케 할 만큼 풍요롭고 지혜로운 고장이다.

강진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이 많다. 강진읍 거리 벽화에도 다산 선생 그림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선생과 연관된 유적지도 많다. 그 중 첫 번째가 사의재(四宜齋)다. 사의재는 다산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첫 번째로 기거한 곳으로, 사의재란 이름은 '생각을 맑게, 용모를 단정히, 말을 적게, 행동을 더욱 무겁게'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선생이 지었다. 강진군은 2009년 사의재(강진읍 사의재길 27, 동성리)를 중심으로 주막 식당, 초정 및 연못 조성 등 복원사업을 완료했다. 2018년 사의재 한옥체험관 건립사업으로 숙박 동 증축 및 편의시설을 만들었다. 다산 선생이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두 번째로 지낸 곳은 강진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寶恩山房)이다. 보은산방(강진군 강진읍 고성길 260, 남성리) 산길은 봄엔 벚꽃이, 여름엔 수국이, 가을엔 단품이 아름다운 길이다. 보은산방에 서면 강진읍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다산 선생은 사의재와 보은산방에서 강진읍 여섯 제자를 가르치고, 52편의 시와 주역 사전, 상례 사전을 썼다. 제자 이학래 집을 거쳐 다산은 47세, 1808년 봄에 외가이던 해남 윤씨가문에서 마련해준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산초당아래 다산박물관

다산초당(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만덕리)에서는 1818년 9월 14일 유배가 끝날 때까지 10여 년을 머물렀다. 선생은 초당에서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저서 600여 권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열여덟 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다산초당에는 '정석(丁石) 바위'가 있는데, 다산 선생이 자신의 성인 '고무래 정(丁)'자를 파서 새겨 넣은 것으로 군더더기 없는 선생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초당 옆에 있는 연못은 다산 선생이 실학을 집대성하며, 지친 심신을 달래던 곳으로, 연못 가운데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즐기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초당 앞에는 차를 끓여 마시던 다조가 있고, 건물로는 제자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고 토론하던 서암(西庵)과 선생이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동암(東庵)이 있다. 다산초당 아래에 '다산박물관(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만덕리)'이 있는데, 다산 선생을 기념하고,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며, 다산이 품었을 감성과 지혜를 전달하고 있다. 다산박물관 앞에는 다산 선생이 남긴 글 중 명언을 골라 '말씀의 숲'으로 조성해 놓은 걸 볼 수 있다.

다산정약용이 건립한 수원 화성

공자는 논어에서 선비의 자질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첫째 등급은 부끄러움을 알아 자신을 단속하고 외국에 나가 자신의 중임을 수행하는 선비, 둘째 등급은 일가친척이 효성스럽다 일컫고 한마을 사람이 공손하다 일컫는 선비다. 자공이 그다음 등급을 묻자 공자는 말에 신의 있고 행동에 과단성 있는 사람은 견식과 도량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셋째 등급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1972년 9월,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 총리와 국교 회복 공동성명 문안을 확정하고 '言必信(언필신) 行必果(행필과)'라고 써주었다. 다나카 총리는 기뻐하며 "신(信)은 만사(萬事)의 근본"이라는 일본어를 적어 건넸다. 중국 총리가 일본 총리를 선비의 첫째와 둘째 등급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도 일본 총리는 기뻐했을까?

가을이 오는 길목, 아름다운 남도 답사 일 번지를 찾아 다산 선생 흔적을 찾아 길을 걸으며, 선생의 사상을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권자인 시민의 철학과 지혜가 더 밝고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등일보 시민기자 정규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